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셀 블레이즈델 (문단 편집) == 유모차 공수작전 == [[1950년]] [[9월]] [[인천상륙작전]]과 서울 수복 이후 블레이즈델 중령은 또 다른 군목인 월레스 I. 울버튼과 [[서울]] 지역의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. 당초 이 고아들은 서울의 한 [[고아원]]에 수용됐으나 고아가 계속 늘어나면서 블레이즈델은 멀 Y. 스트랭 하사 및 한국의 고아원 근무자들과 함께 고아 수용 시설을 설립해 1000명 이상의 고아들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했다. 울버튼이 한국을 떠난 후에도 블레이즈델은 시설 운영을 계속했다. [[1950년]] [[12월]], [[중국인민지원군]]과 [[조선인민군]]이 2단계 공세 작전으로 서울을 위협하자, 제5공군을 포함한 [[유엔군사령부|유엔군]]은 도시에서 후퇴하여 더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. [[12월 19일]] 블레이즈델 중령과 스트랭 하사는 해군 [[LST]]로 [[인천항]]에서 고아를 태워 [[제주도]]로 대피시키려 했으나 선박은 도착하지 못했다. 블레이즈델은 그때 제5공군 작전국장 T.C. 로저스 대령에게 다가가 호소했다. 로저스 대령은 [[수송기]]를 편성해줄 테니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김포 공군기지에 아이들을 데려오라 했다. 시간이 촉박했던 블레이즈델은 상부의 명령이라는 가짜 임의 지시로 100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한국인 근무자들을 [[미 해병대]] 중대 트럭 14대로 [[김포시|김포]]까지 수송했다. 두 시간 이상 늦게 김포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, 고아들은 16대의 [[C-54]] 스카이마스터 수송기를 타고 [[제주도]]의 안전한 곳으로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. [[제주]]에 고아원이 세워져 6.25전쟁 말기까지 [[황온순]] 여사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후에 [[서울]]로 다시 옮겨졌다. 블레이즈델은 나중에 해병대 트럭 징발 문제로 미 공군 [[군법회의]]에 회부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